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팔 전투 (문단 편집) == 발단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ohima.jpg]] 임팔은 [[인도]] 북동부 아삼 지방에 위치한 곳으로, 연합군의 중국행 보급로의 시작지점이라는 전략적 요지였고, 그렇기에 [[일본 제국|일본]]은 이곳을 공략하면 [[중국]] [[국민혁명군]]을 압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찬드라 보스]]가 이끄는 인도 독립군과 결탁하면서 이 침략을 토대로 인도를 독립시켜 추축국 파벌로 포섭하거나, 하다못해 인도를 연합군에서 탈퇴시키는 것만 하더라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일본입장에선 상당한 시간을 벌 수 있게 된다. 인도의 독립을 막는게 인도 제국군이 아니라 영국군의 비중이 높은 만큼 영국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사실상 중국의 압박과 인도의 독립, 인도의 연합군 탈퇴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1942년 8월 [[과달카날 전역|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된 시점부터 이미 임팔을 공략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방위체계가 부실한 데다 현지 사령관들이 반대하여 일단 공략 작전은 중지되었으나 상술한 전략적 이점을 포기하지 못한 수뇌부는 전략 연구를 멈추지 않고 언젠가 작전을 시행할 수 있을때를 대비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안가 일본군이 버마 지역 방위부터 굳히기로 할 즈음 [[영국 육군]] 윈게이트 장군(Orde Charles Wingate, 1903~1944)[* [[영국군]]의 [[미합중국 해병대|미 해병대]] 레이더스에서 모티브를 얻어 조직한 제 77 인도보병여단이자 [[인도 제국군]] 병사들, 영국군, [[네팔]] [[구르카 용병]]으로 이루어진 정글 유격전 부대인 [[친디트|친디트 부대]](친테 부대)를 창설한 사람이다.] 이 이끄는 공수부대가 버마 서북부에서 게릴라 작전을 시작하고 연합군 정찰 부대 또한 이 인근을 수색하는등 수상한 징후를 보이자 일본군 수뇌부는 이를 대대적인 공세를 위한 준비라 시작하고 해당 방면의 군대를 대대적으로 재편성하며 버마 방면 사령관으로는 육군 중장 [[가와베 마사카즈]](河辺正三)를, 그 휘하로는 제15군[* 사령부는 미얀마 삔우린(Pyin U Lwin)에 위치했다. "메묘" 또는 "메이묘"라고도 불린다]과 제55사단, 그리고 직할 부대를 배치하며 마지막으로''' 제15군 사령관에 문제의 [[무타구치 렌야]]가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